희망 계약서 / 박인자 (박동미)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 싣고 있다가 그 이상 되면 비워 버린다. 세상사는 이치도 마찬가지다. 그릇의 크기만큼 삶을 살아간다. 오늘 하루가 오래된 약속처럼 분주하게 붉은 노을 지키고 있다. 그 많던 들녘의 풀꽃과 풀벌레들은 어디로 갔는지, 그리운 사람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가고, 길 건너편 은행나무만이 유일한 친구 되어 평화롭게 서 있다. 봄이면 아기 손바닥 마냥 파릇파릇 잎 달고 여름 되면 잎 키워 숲 만들고 가을 되면 노란 단풍과 열매 아낌없이 주고 겨울이면 빈 몸으로 칼바람 견디며 평생 오일장 돌며 난전에서 생선장사 하던 아버지처럼 늘 곁에서 나를 지켜준다.
요즘 들어 낯선 사람들이 부쩍 건물 보러 오곤 해서 불길한 예감 들었는데, 드디어 건물이 팔렸다. 12억 넘는 건물이라 평생에 한 번 만지기도 어려운 금액이라 쉽게 팔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병원 들어온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입증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병원 들어온다면 점포를 다 비워야 하는 비상사태 발생한다. 몇 달 전에 세 들어 온 장식 집이 제일 큰 타격이다. 다른 곳에서 도로 뚫리는 바람에 이사 왔다. 우리 가게만 낡은 박물관의 모습으로 강산이 몇 번 바뀌도록 전통을 지키고 있다.
우리가 이사 올쯤엔 변두리인 이곳은 인적 뜸한 외진 곳이라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고 점포가 없어 저녁이면 우리 가게 간판만 유일하게 어둠 환하게 밝혔다. 도로 건너편 언덕 위 빨간 양철지붕의 보육원 자리엔, 아파트 부지로 팔려서 빌딩 짓고 시골에 과수원 수십만 평 사서 평생 놀고 먹을 수 있는 부자 되었다. 보육원 주인 딸은 초등학교 다닐 때 미국 원조품인 미제 가방에 미제 구두 신은 신데렐라였다. 책가방 서로 들어주고 미제 과자 얻어먹으려고 그 아이 곁에는 항상 아이들로 붐볐다. 우리들의 우상이며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처음 이사 올 때는 열심히 살다 보면 이 건물의 주인이 될 것이라 믿었는데, 아카시아 꽃 아래로 강산이 몇 번 바뀌어 봄이 오고 가는 동안에 땅 한 평 갖지 못했다.
건물주인 부탁으로 소방 교육 4일간 받아 주기로 하고 소방 2급 자격증만 따면 월 얼마씩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서 시작했지만 만만치 않아 삼수 끝에 겨우 합격해서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교육만 받으면 아무나 다 합격증 준다는 말만 믿고 교육 갔다가 낭패 본 것이다. 두 번 떨어지고부터는 오기가 생겨 문제집 하나 구매해서 시간만 나면 붙들고 문제를 풀더니 드디어 합격했다. 건물에 당당하게 관리자 이름 올리게 되어 주인한테 관리자로서 명분이 섰는데, 잉크도 마르기 전에 건물이 팔려 무용지물이 되었다. 주인이 외국에 있어 건물 팔려고 내어 놓았기에 언제 팔릴지 모르는데 그런 부탁 왜 들어주느냐며 부부 싸움도 많이 했는데, 사람이 오지랖이 넓어 손해 본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세상의 이치가 그런 것이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 앞에 서면 주눅 들고 작아지는 건 왜일까? 때때로 삶, 내다 버리고 싶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길을 내고 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더 확실한 삶을 누릴 수 있을 텐데, "축 개업"이라는 현수막이 몇 달째 내 걸려 지나는 이의 시선 잡아끌던 25년 전 개업식 날 그때 생각하면 가슴 설렌다.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전부는 아닌데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 인생관을 가져야 하는데 머리로는 되는데 가슴으로 잘 안 된다. 열심히 살았던 지난날의 일기장엔 그대의 뜰에 배롱나무로 살다 죽고 싶다. 고 적혀 있다.
따르릉, 정오의 기다림은 자동차의 소음보다 더 빠르게 전화벨 속으로 사라졌다. 건물이 팔려 며칠 지났지만,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불경기에 세를 올릴까 봐 전전긍긍했는데 오늘 2시 길 건너편 부동산에서 계약한다고 드디어 연락이 왔다. 주인은 세입자를 따로 불러 은밀히 계약이 진행된다고 지하 원단창고 사무실에서 귀띔해 주었다. 우리 점포만 전세로 있어서 전세금 올릴지 불안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날마다 오르던 육교 계단이 오늘따라 아득한 현기증으로 휘청거린다. 삶 사랑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변변한 적금통장 하나 갖지 못했고, 경제는 착하지 않았다.
거룩한 일상은 정글의 수면처럼 납작 엎드린다. 긴 사각 탁자가 팽팽한 긴장감으로 싸늘하게 식었다. 의식의 중심은 미세하게 떨리고 목 조여 오는 수직의 시간은 천오백만 원 더 올리든지 지금 전세에 이십오만 원 더 올려야 한다고 팽팽히 맞서다 협상이 결렬되었다. 처음부터 불리한 게임이었다. 흥정이 쉽게 되지 않아 냉랭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절망의 끝에서 바닥 다 보여주고 항복했다. 며칠 안에 돈 준비하겠다고 약속 하고,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학생이 두 명이라 이 상황만 잘 넘기면 큰 어려움 없이 아이들 졸업시킬 것 같은데 인생은 끓임 없이 도전하는 것인지 산 넘어 산이다. 창 너머 풍경은 내 마음 아는지 미동도 없이 초연하다 건물 주인이 몇 번 바뀌었지만, 인간적 교류로 건물 관리도 해 주고 주인 대리인 역할도 하면서 전세금도 올리지 않고 강산이 몇 번 바뀌도록 계약서 한 번 쓰지 않고 그냥 살았다. 긴 세월 동안 약간의 돈도 비축하지 못한 경제론의 실패자가 된 듯, 오늘은 부자의 대열에 서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인생이란 맑은 차 한 잔 통해 행복 느낄 때가 있다. 정신적으로 초라하고 궁핍한 하루 흐르는 눈물은 시간을 거역할 수 없었다. 부동산 투기라도 했으면 중산층 대열에서 밀려나지 않았을 텐데, 남들처럼 증권이나 주식에 손대 본 일 없고 부동산이 뭔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살았다. 부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보다 계약서 한 번 만져 보지도 못하고 계약은 모두 끝났다. 돈이 준비되면 그때 계약서 준다고 한다. 어떤 권세에도 굴하지 않았는데, 빨간 도장 찍힐 때마다 문서가 떨리고 심장도 뛰었다. 기도는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간절한 소망이다. 한동안 뜨겁게 나를 지배했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성실히 일하면서 한 우물만 판 결과에 쉽게 승복할 수 없었고, 무능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우리는 왜 열망하면서도 이루어지는 게 별로 없을까? 갑과 을의 관계처럼 오늘 하루 인생의 쓴 맛 제대로 맛보았다.
2018. 인천시민문예대전 수필 대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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